나를 바람이라고 생각해
글 ⓒ Day1
불어오는 바람에 길게 자라난 풀이 눕듯이, 바위 사이에 몸을 바짝 기대어 웅크리고 있다.
무자비하게 꽃대를 꺾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딱히 들꽃 위에 눕는 것을 주저하는 편도 아니었다. 오르코 파차의 바람과 코자말루 카의 바람이 함께 지나가는 곳을 눈으로 좇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스스로가 돌멩이가 된 것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건 잠에 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생각을 사라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말이었다. 존재를 내버려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없애는 것도 아닌,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행위에 가까웠을 것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면 오직 눈앞의 장면만이 온 우주가 되어 세상을 전부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풍경에 스미다 못해 시선만이 남아 존재가 날아갔다. 지금까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일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정도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건 가장 본능적인 일이라고,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장면을 벗어나면 새파란 색의 풍경이 펼쳐질 거라고 명확했던 의식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 때쯤이었다.
별안간 들려온 말소리에, 에스티니앙은 눈앞의 사람에게로 금방 시선을 돌렸다. 오늘 하루 에스티니앙의 고용주가 된 펠루펠루족 사람은 여전히 발을 동동거리며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작지 않은 크기의 갈대밭이 보였다. 에스티니앙의 등판에는 여전히 창이 있었지만, 옷은 비교적 가벼운 차림이었고 한 손에는 갈고리가 들려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주변 풍경을 크게 훑는 척하면서 시선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겨두었다. 주로 수풀과 바위들이 뒤섞인 언덕과 통일감이 없는 색의 나무들이 전부였다. 아까 뚫어지게 쳐다봤던 풍경과 달라진 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는데, 분명히 무언가 달라져 있다고 에스티니앙은 제법 확신했다. 누군가는 그걸 인기척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는 그걸 감이 좋은 거라고 표현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바위 사이로 둥근 정수리 하나가 밀고 올라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쪽도 이제는 이 판판한 지대에 서 있는 사람 둘을 끝까지 모르는 체할 수는 없게 된 모양이었다. 에스티니앙은 펠루펠루족 사람을 보며 정확하게 말했다.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래 봬도 실력이 뛰어난 동료와 함께 있거든."
오래 함께한 무기가 나의 분신과 같다는 사유도 있지만, 전투 활동과는 거의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의뢰 내용에도 창을 꼭 지니고 다니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오래 방치된 땅에서 자라난 작물에는 유달리 다양한 것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어릴 때 저만 믿는 양들을 이끌고 작은 모험을 했다가 피를 본 경험이라든가, 얀샤의 험준한 돌산 중턱에 올랐다가 잊혀진 약수터에 모여든 야생 동물 무리와 마주쳤다든가 하는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고용주가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동안 자신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특별한 사유가 있을 거라고, 그건 아무리 에스티니앙이라도 쉽게 예상할 수가 있었다. 갈대의 에테르를 노리고 다가와 사람에게까지 적대적으로 굴만한 마물들은 누군가가 이미 풀과 돌이나 바람이 되는 마음으로 누워있던 시간을 보내기 이전에 숨이란 숨을 족족 다 끊어놓고 왔을 게 눈에 훤하다면 훤했다. 에스티니앙의 '동료'라는 자는 보통 사냥한 마물들을 여기서 먼 산맥에 가져다 두고, 한번 이렇게 해두면 당분간은 위험한 것들이 진동하는 피 냄새부터 맡기 때문에 다가오지 않는다고 설명까지 해준 적이 있었다. 현재의 평온함에 보탬을 할만한 후보군이라곤 몇 개 없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나름 몰래 숨어있었던 그가 뒤늦게 아무 일도 없던 척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체하는 것보다도, 밑에 서 있는 에스티니앙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먼저였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은 그가 가진 특기 중 하나였는데, 얄밉게도 에스티니앙은 그의 등장에 전혀 놀란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에스티니앙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비스듬히 서 있었다. 그나마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왔나. 스이카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야생의 힘으로 이만큼이나 자라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용케도 몰래 키운 것인지. 무슨 사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도 에테르에 저절로 끌리는 마물들이 멀리서부터 탐내며 찾아올 것만은 확실했다. 코자말루 카의 에테라이트 근처에 있던 갈대밭만큼은 아니어도 소규모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크기의 갈대밭이었다. 펠루펠루족 사람은 에스티니앙과 스이카가 여기에 단둘이 있어도 괜찮은 게 맞는지 이중, 삼중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던 스이카는 시선을 다시 에스티니앙에게로 돌렸다. 에스티니앙은 슬슬 갈대를 수확해달라는 의뢰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이카는 사뭇 지각이라도 한 것 같은 사람의 태도라고 해야 할지, 남몰래 어디 멀리서 농땡이라도 피우다 걸린 듯한 태도였다. 그는 여분으로 놓여있던 갈고리를 주워들었다. 에스티니앙이 힘을 주어 진흙이 묻은 머리채 같은 것들을 뽑아내는 동안, 스이카는 에스티니앙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고서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답지 않게 에스티니앙의 턱 밑으로 땀이 송글 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희한한 풍경 속에 한참을 조용히 속해있던 스이카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에스티니앙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면, 당연히 왔을 거야."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에스티니앙의 입장에서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이카는 난데없이 책망하는 말투였고, 그건 스이카가 상황을 설명하려는 변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에스티니앙의 시선은 여전히 엉킨 뿌리나 흙탕물 따위에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웃음기를 띄며 바뀌고 있었다.
"난 내 파트너와 보수를 나눠 가질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뒤에 달린 0의 개수만 보고 덜컥 받은 의뢰였거든. 스이카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멈춰서 에스티니앙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 다 몸을 구부렸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높이차가 줄어들며 눈높이가 비슷해지는 찰나의 순간이 있었다. 에스티니앙이 어깨를 으쓱하자 굳어있던 스이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헤친 갈대 뿌리들을 한쪽으로 모아두기 위해 에스티니앙은 흙탕물을 먹고 축 처진 것들을 구석으로 있는 힘껏 내던졌다. 의뢰 내용에 관심이라고 해야 할지, 스이카가 에스티니앙에게 다시 말을 건 것은 일에 손을 보태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0이 몇 개나 있었어?"
"흠."
에스티니앙은 잠시 멈춰서 갈고리를 진흙에 박아 넣더니, 창에 기대듯이 갈고리에 무게를 맡기고 서 있었다. 그가 기어이 셈을 하겠다고 한쪽 손가락을 다 펼쳤다. 스이카도 조금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표정으로 크게 티를 내지 않고 그저 되묻기만 하는 스이카에게 에스티니앙은 살짝 구겨져 있는 의뢰서를 건넸다. 종이를 받는 와중에 손에 묻어있던 흙이 의뢰서 귀퉁이에 옮겨붙었는데, 스이카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보는 순간 구석진 곳의 너저분해진 부분 따위는 잠시 잊어버릴 수 있는 액수이기는 했다.
종이를 되돌려주기 위해 펼친 손동작이 영 미심쩍다는 눈치였다. 다시 작업을 시작한 에스티니앙의 뒤로, 스이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할 정도로......."
지금까지 뿌리를 뽑는 내내 에스티니앙은 한 번씩 주변 상황을 둘러 보고 있었다. 아마 스이카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을 거라고 에스티니앙은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었는데, 직접 스이카쪽을 보고 있자니 사실 다른 것에도 관심이 팔려있을지 모르겠다고 대충은 알만했다. 대체 여기서 사기를 당할 만한 요소가 뭐가 있는지 혼자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스이카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일을 다 마친 후에 보수를 받으러 찾아갔더니 그 펠루펠루족 사람은 사라져 버렸다는, 그런 황당무계한 사기 행적 이외에는 예상하고 있는 일이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인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었다. 이해할 수 없기에 통제도 할 수 없다는 사고 흐름 자체가 스이카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에스티니앙은 감이 뛰어난 편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그런 면에서 스이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이카가 체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소모하는 중에도 멈추지 않고 갈대를 척척 처리한 덕분에, 곧 에스티니앙이 스이카에게 부쩍 가까이 다가와 갖고 있던 갈고리를 거둬갔다. 그가 일이 얼추 마무리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갈대는 오늘 안으로 사람이 와서 수거한다고 했으니......공중에 던지는 혼잣말 같은 에스티니앙의 부가 설명이 마저 끝나기도 전에 스이카는 다음으로 할 일을 미리 다 정해둔 듯한 눈치였다. 이제 한 손에는 갈고리 대신 에스티니앙이 당당하게 빼내온 갈대 하나를 쥐고 있었다. 수확하고 나면 몇 개는 가져가도 된다고 펠루펠루족 사람이 말했던 건데, 딱히 가져갈 필요성을 못 느껴서 스이카에게나 하나 건네줬다. 그렇게 비장할 이유가 있냐고 에스티니앙이 물어보기 전에 스이카가 먼저 말했다.
"이제 의뢰인을 찾으러 가자."
"그건 나중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비해 계곡물에 여러 차례 헹궈온 갈대를 씹으려는 순간, 들려오는 에스티니앙의 말에 스이카는 기운이 아예 빠져나간 사람처럼 행동을 정지했다.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있는 스이카를 보며 에스티니앙은 어쩐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표정에서 ' 왜?'라는 질문이 읽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거든."
에스티니앙의 말을 마지막으로 군말 없이 따라 올라간 곳에는, 잡초도 뽑히지 않은 채로 방치된 게 분명한 무덤이 딱 하나 있었다. 주거지와 큰길과는 거리가 멀어서 보통 나무나 빽빽하게 심어져 있을법한 장소였다. 홀로 산에 뚝 떨어져 있도록 만들어둔 것에 분명 어떤 의도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만한 위치 선정이었다. 들꽃이 무성한 것으로 보아 봉긋 솟아있는 무덤 자체는 최근에 생긴 게 아닌 것 같았다. 다만, 무덤 앞쪽에 세워져 있는 비석 근처를 파헤친 흔적이 있었다. 에스티니앙과 스이카는 무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보다 높은 위치에서 몸을 약간 낮춘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요컨대, 환경 미화 활동을 위한 의뢰서였구나."
고저 없는 깨달음의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다만 굉장히 위험한 작업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제서야 의뢰서에 적혀있던 숫자에 대해 스이카가 깔끔하게 납득한 모양이었다. 스이카는 도시락을 꺼내는 것처럼 가져온 갈대를 꺼내어 끝 쪽을 살짝 깨물었다. 질기고 짠 식물 섬유를 맛보는데, 정확히는 무슨 맛이 난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고농축된 바람의 에테르가 느껴진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솔루션 나인의 음식들을 떠오르게 했다.
"비석에 튀어있는 건 동물의 피려나."
"그럼 차라리 다행이고."
에스티니앙은 알고 있었다. 스이카가 마물이나 괴물 따위를 무서워해서 질문한 게 아니었다. 옆 마을 야산에 아무리 흉악하고 무서운 야생 동물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한들 그런 건 다 상관없고 괜찮다고 했었다. 경험상 뭐든지 존재에 물성이 있기만 하다면 물리력을 행사하면 그만이라고 말하며, 그들은 실제로도 맨몸으로 두들겨 패고, 하다가 못 해 창과 칼로 찌르고, 불을 붙여 태울 때도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수많은 것들을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런 수상한 무덤처럼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은 스이카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무덤에만 해도 증명되지 않는 온갖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수도 있었다. 작게는 불운, 크게는 원한이나 저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기에 스이카가 정말 로 두려워하는 것도 누군가의 마음 한켠에 들어차 있을지도 모를 복수심, 값을 치를 수 없는 죄, 마음에 남아 두고두고 떠오르는 흉터, 고쳐 쓸 수 없는 기억, 죽어서도 살아서도 갚을 수가 없는 것들로 채워졌다. 스이카가 앞만 보며 생각에 빠져든 것은 찰나였지만 바로 그 찰나에 옆의 사람이 스이카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뒀었다. 그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모험가의 신분으로 새로운 장소에 찾아가서 새로운 자신, 새로운 기억을 만났지만 가끔은 에스티니앙에게도 새 것을 통해 옛날의 일을 스쳐 지나가는 경험이 있었다. 추억이라고 아름답게는 칭할 수는 없는 것들이 아주 교묘하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겹쳐 눈앞에 비치곤 했다. 그런 점에서 스이카가 티를 잘 내지 않는다 해도 스이카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은 그가 해내는 무언의 노력을 알고 있었다. 만년설도 유지하려면 눈이 계속해서 내려야 했고 그런 건 알아챌 수 없는 부류가 아니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에스티니앙으로선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에스티니앙은 스이카의 행보에 이유를 더 묻지 않은 채 그저 현재를 납득하기로 결심했고,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고민을 토로하는 것보다 대신 근처에서 서성이고, 시간 들여 위험할 수 있는 마물을 치워두고, 행여 사기라도 당할까 걱정해주는 일을 더 기꺼이 한다는 점이 조금 기이하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굳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예상할 필요는 못 느낀다는 점에서 둘은 차이점을 보였다. 에스티니앙은 우선, 지금 스이카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만 보면 에스티니앙도 스이카와 생각이 일치했다.
별안간 에스티니앙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등에 지면서 쇠가 흙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하여튼, 지켜본 바로는 딱히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었군."
"이 정도로 괜찮아?"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만 봐달라고 했던 거라. 내 뒤를 이어서 또 누군가가 의뢰를 받고 감시할 거야."
그 사람도 보수비 많이 받겠네. 무미건조해 보이는 감상은 뒤로 하고 무릎에 붙은 보랏빛 나뭇잎을 훌훌 털어내며 스이카가 에스티니앙의 뒤를 따라나섰다. 꼼꼼하게 다 씹어서 먹고 질긴 부분만 남은 갈대는 지나가는 중에 수풀 속에다 던져두었다. 내려가는 길에서 둘은 조금 전에 열심히 일해서 결국 지도에서 삭제시켜 버린 갈대밭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무덤과 관련된 사항은 당분간 미지로 남겠지만 갈대밭의 유무는 분명한 끝맺음이 있다.
"갈대밭, 누가 진짜로 심은 걸까."
이전과 달리 텅 비어버린 게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에 서서 자신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던 자신을 갑자기 하나의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건은 분명히 일어났었다.
"마을 근처에서 재배하는 게 아니라면 위험할 텐데."
"성도에서도 남몰래 온실에다 양귀비를 키우는 작자들이 있었지."
"그런 심리와 비슷한 걸지도 몰라."
스이카의 얼굴에 아주 약한 미소가 띠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앞서가다 잠시 멈춰 서서 스이카를 기다리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다시 무덤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격이 좁혀지자 에스 티니앙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옛날엔 저런 걸 봐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에스티니앙이 있는 쪽으로 스이카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으나, 머리카락으로 가려둔 탓에 스이카가 지금 무슨 눈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계속 위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묻혔군, 저 가족은 꽤 부유하게 살았나 보네, 생각하는 정도였고."
해가 저물고 나서는 바람의 온도부터 달라졌다. 불현듯 느껴지는 차이에도 스이카는 우선 에스티니앙이 하는 말을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가끔 스이카와 에스티니앙에게는 이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들 중 한 명이 일생의 복수를 마치고 지금까지의 여정을 이어오는 동안 무엇을 깨달았는지, 어디서 삶의 가능성을 엿보았는지에 대해 단지 말 몇 마디나 행동으로 인해 알게 되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둘의 끝이었다. 스이카가 생각하는 자기의 역할은 에스티니앙이 나아가는 일을 돕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며, 에스티니앙도 그걸 누군가의 앞에서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다들 각자의 사연이 있다고 해야되나··· ···. 그런 걸 갑자기 깨닫게 된 거지."
나도 그래.
말을 끝내고 앞서가는 에스티니앙의 뒤에서 스이카는 생각했다. 그러다 스이카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잠깐 걷는 법을 잊었다. 생각에서 그친 것만이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에스티니앙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스이카에게 남은 것은 약간 벌어지다 만 입술뿐이었다. 스이카는 뒤늦게라도 입을 꾹 잠그듯이 다물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고,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마음속으로 몇 번씩이나 대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남을 진심으로 외면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었다. 영원히 방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고 있어도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지른 일들이 사라지지 않고 흉터처럼 남아 있는 동안에도, 전혀 상관없는 남의 무덤에서 각자의 의미를 찾아낼 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은 생겨나고 있었다. 에스티니앙과 스이카는 삶의 가능성이 주는 모순 같은 것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그 모든 일이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남아 함께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다.
스이카는 생각했다. 그래도 나의 아주 중요한 순간에는, 그가 가다 말고 돌아와 무엇이라도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대로 우연히 소매끝이나 혹은 손가락 끝이 스친다고 할지언정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다짐처럼 생각했다. 달빛이 너무 밝아서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그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기를 바란다. 잘 대해주는 것도, 원하는 걸 하고 행복하기를 강제하는 것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을 거라고 에스티니앙이 덤덤하게 생각하고 궁금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단지 그냥 바람이 세게 불었나 보다, 생각만 하기를 소원한다. 바위 사이에 누워있던 바람이 사람으로 불리는 걸로, 직접 없앤 갈대밭이 없는 걸 가지고 뒤늦게 이상하다고 느끼고야 마는 마음을 평생 몰랐으면 한다.
스이카는 외면하는 일 없이 한참을 에스티니앙 뒤통수의 묶인 머리만 노려보며 그의 뒤를 쫓아 나섰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다가 말다가 했던 둘의 거리가 자로 잰 듯한 거리감으로 유지되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만년설에다 계속해서 눈을 뿌리는 치열함이라는 것을 스이카만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에스티니앙이 에테라이트까지 찾아가 고용주에게 받은 보수를 스이카의 눈앞에 건넬 때까지, 그가 자신의 유일한 파트너에게 이제 집에 돌아가자고 제안할 때까지, 스이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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